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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새발 일기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면 행복할까 - 1

나는 얼마 전 꿈을 좇아 충동적으로 퇴사를 지르고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이자 입사한지 딱 한 달 째인 날이다. 기념으로 내 경험을 주절주절 읊어본다.

전 직장을 떠난 이유

 

이 한 장이 모든 걸 설명한다

 

노답 문화

성희롱 + 군대 문화 + 파벌 형성의 대환장 콜라보였다. 아래는 내가 직접 듣고 겪은 사례들이다.


1. 입사 첫 날, 이제 신입이 회식 장소를 잡으라며 단란주점을 추천함

2. 워크샵 때 그 깡시골에서 불법 성매매 업소 찾아서 놀러 감

3. 너 그렇게 쌀 밥 안 먹으면/몸매가 그러면 나중에 애 낳기 힘들다고 잔소리(심지어 남자라 출산 경험도 없으면서ㅎㅎ)

4. 40대 차장이 자신을 오빠라고 지칭함

5. 애인은 왜 없는지, 결혼은 왜 안 하는지, 혹시 동성을 좋아하는 건 아닌지 주기적으로 물어 봄

 

여기에 차마 쓰지 못할 심한 성희롱과 신체 접촉도 일상이었다.

 

 

중성화 못 시키고 퇴사한 게 천추의 한이다

 


군대/꼰대 문화는 또 얼마나 강한지, 선배가 뭘로 보이냐며 혼나고 다나까 안 썼다고 혼났다.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거의 맞을 뻔한 분위기까지 흘러간 적도 있다. 미팅 때 말 몇마디 하면 윗선에 안 알리고 마음대로 의견 제시한다고 혼났고, 그래서 조용히 있으면 왜 가만히 있냐고 혼났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알고리즘

 

 

모든 의사결정은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졌다. 일이 어찌되든 사장이 시켰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허울만 좋게 만든 'CEO와의 대화'는 사장 얘기만 1시간 넘게 듣다 오는 식이었다.

공채인지, 대학은 어딜 나왔는지, 동네는 어디인지에 따라 내 가치가 결정되고 파벌이 형성되었다. 4-50대나 된 사람들이 행동은 유치하기가 짝이 없었다.

 

똥망 커리어

1년차까지는 대기업 공채 신입의 뽕에 가득 차있었다. 취직한 게 마냥 행복했고 이대로 인생이 잘 흘러갈 것만 같았다. 입사 동기들과 온보딩 과제 하면서 놀러 다니다보니 1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캬 신입 뽕에 취한다

 


2년차가 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나는 개발자로 입사했는데 외주 업체를 들들 볶고 그 결과를 엑셀에 정리하는 작업만 했다. 상사들은 주식, 부동산, 사내 정치에만 관심이 있고 개발 트렌드나 커리어 관련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REST API가 뭔지도 몰라 나한테 물어봤다.

 

진정해, 밖은 전쟁터야

아직 신입이라 중요한 일을 안 맡기는 거겠지, 참고 버티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하며 기다렸다. 이직을 해도 다 거기서 거기겠거니 싶었다. 직장인 커뮤니티를 보면 아무리 좋은 회사를 다녀도 다 자기 회사가 최악이라고 난리였으니까. 주위 어른들은 원래 회사가 다 그런거라며 내가 철이 없다고 쓴소리를 하곤 했으니까.

 

충동적으로 지른 퇴사

그렇게 2년차까지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다시 개발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강의를 듣고 주말엔 대외 활동에 참여했다.

어느 날 우연히 상사에게 개발 대회에서 상을 탄 이야기를 했다. 그날로 난리가 나서 파트장과 사수에게 불려갔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왜 그런 데를 쏘다니냐는 것이었다. 앞으로 그런 개인 행동은 회사에 보고해서 허락맡고 하라며.

 

 

그날로 나는 폭발했다

 


며칠 뒤 나는 대책없이 퇴사 의사를 밝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없는 회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기력하고 잿밥에만 관심있는 선배들의 모습이 미래의 내가 될 것 같았다.

 

퇴사를 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방해 공작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무사히 빠져나왔다. 회사에서 마지막 짐을 챙겨나올 때의 그 후련함은 잊지 못한다.

 

 

퇴사 직후가 제일 신나고 행복하다

 

 

 

백수 생활의 시작

구직 활동에 앞서, 이직할 직장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 2가지를 정했다.

 

첫째, 직접 개발을 하는 회사이며 성장할 수 있는 곳일 것

둘째, 성희롱과 꼰대 문화가 없는 수평적인 조직일 것

 

돈, 워라밸...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운 좋게 지원한 몇몇 회사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개발 쪽으로 정말 유명한 기업의 어떤 면접관님은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나와 꼭 일하고 싶다며, 감사하게도 추천 전형으로 올려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3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것에 대한 벌을 혹독하게 받았다. 그저 학부 1~2학년 수준의 기초 지식으로 레퍼런스를 보며 떠듬떠듬 코딩하는 수준이었던 나는 분산 환경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최신 서버 기술에 대해 알고 있는지,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칠판에 코딩해볼 수 있는지 등의 질문에 단 하나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딱 내 심정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3년차 개발자에게 회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몸소 깨달았고, 그에 따라 공부 방향도 좀 더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연차의 다른 개발자들은 나보다 훨씬 앞서서 뛰어가고 있었다. 그 갭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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