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개발새발 일기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면 행복할까 - 2

지금의 회사로 옮긴 이유

회사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고?

회사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3년간 지켜본 전 직장은 서로 책임 소재를 떠넘기고 싸우기 바빴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모이기만 하면 각자의 회사 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퇴사하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막연히 다들 이렇게 살겠거니 했다.

 

그 대화의 끝은 항상 유튜브 하자로 끝났다

 

그러다 해링이라는 친구의 SNS 게시물을 보았다. 회사를 다니는 게 즐거워보였고,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

 

회사를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다고? 진심이야? 나는 빨리 퇴근할 궁리만 하고 출근하는 게 지옥이었는데?

 

'원래 SNS에는 좋은 글만 올리는 법이니까...' 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해링의 SNS를 예의주시(!)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더 충격적이었다. 회사 동료와 SNS 친구를 맺고 즐겁게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 후에 업무 카톡 오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게 회사 동료라는 존재 아니었던가? 심지어 회사의 좋은 소식을 공유하며 자랑하다니! 길거리에서 회사 이름만 봐도 화가 솟구치는 게 정상 아니었던가!

 

분명 이게 정상이었는데

그렇게 해링이 다니는 회사를 검색해보았다. 만화 원피스의 내용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반말로 소통하는 것이 독특했다. 사내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보였다.

말만 번지르르 한 건 아닐지, 정말 실제로도 좋을지 의심이 됐다. 전 직장인 S모 기업도 외부에서는 혁신적이고 젊은 이미지를 표방했으니까.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또 다른 좋은 경험이 되길 바라며 일단 지원서를 제출했다.

면접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

며칠 뒤, 다행히도 면접 기회를 얻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내가 대답할 때마다 면접관은 각자의 노트북과 핸드폰에 무언가를 빠르게 써나갔다. 동아리 운영진일 때 면접관으로서 내가 그렇게 호다닥 타자를 쳤던 이유는 단지 기억하기 위해 면접자의 대답을 받아 적거나, '배고프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등의 잡담이었다. 그래서,

 

저 분들도 아마 그런 거겠지 !! 후후!!! 난 다 알아!!! 하나도 안 떨려!!! 하하하하!!!!!!

 

라며 자기 최면을 걸어보았지만...장렬하게 실패했다. 우다다 타자 소리에 불안감은 배로 높아졌다.

 


안 그래도 아는 거 없음 + 긴장의 콜라보로 또 다시 면접을 후루룩 말아먹었다. 진짜 알았던 것도 면접에서 들으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가 개발했던 코드를 다시 설명하는 것 조차 어버버 하다 끝났으니 말 다했다. '아, 이렇게 나의 1분기 이직 도전은 끝이구나' 싶어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전산 오류 전형으로 합격했나요?

일주일 뒤,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직무 면접에 합격했다고 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컬쳐 면접을 진행했고....세상에 글쎄, 최종 합격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첫 출근에도 불안한 마음은 가득했다. 커뮤니케이션 미스나 전산 오류로 합격된 걸까 싶어 전날 밤잠을 설쳤다. 면접봤던 분이 나를 보고 '어? 도던씨가 합격 하셨다고요? 죄송한데 뭔가 잘못된거 같은데...' 라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이내 쫒아낼까봐 제발 그분을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했다(진짜로).

혹여 정말 그런 일이 생길까봐 화장실도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첩보 작전(...) 하는 것 마냥 몰래 갔다. 근데 웬걸?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그 분을 딱 마주쳐버린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별 생각을 다 했다. 나가라고 하면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하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씩씩한 캔디처럼 '하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하면서 애써 눈물을 감추고 쿨하게 나가야 할까?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떼를 쓰며 설득해야 할까?

그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어, 도던씨 왔어요?

.....응? 나 부른 거 맞아? 내가 온다는 거 정말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나 합격한거 맞아??????


그렇다!!!!!! 나는!!!!!! 찐으로 합격이었던 것이다!!!!!!!!! 나도!!!! 개발자로!!!!!!! 일하게!!!!!! 된 거라고!!!!!!! 꺄아아아악!!!!!!!!! 소리 질러!!!!!!!!!!!!!

감덩의 눈물...ㅠ

그 말 한 마디가 뭐라고 심장이 쿵 내려 앉고 이내 안심이 되던지...지금 생각해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한 달간 느낀 문화 충격

그래서 이직해서 행복하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행복하다. 일단 정말 하고 싶었던 개발 업무를 하게 되니 모든 것이 새롭고 즐겁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착똑야는 실존했다

이 회사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착똑야'이다.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는 슬로건 아래, '착'하고 '똑'똑하고 '야'망있는 사람과 일하겠다는 것이다.

'흠, 그래 뭐...어느 회사나 인재상은 높게 설정하니까...'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실제 이곳 모든 사람들이 '착똑야'였다. 나이, 학벌, 경력 따위는 상관없이 자신있게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활기가 넘치고, 솔직하고, 열정적이었다.

 

 

특히 우리 개발 챕터는 각 분야의 최고를 모아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하고 배울 점이 많다.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어마어마해보이는 일을 혼자 뚝딱 처리해낸다. 게다가 어떤 어설프고 바보같은 질문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친절하게 도와준다. 이렇게 스윗할 수가...당신들은 진정 내 마음 속 사카린이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전 직장은 사장이 원하는 사업을 사장의 지시대로 해야했다. 이른바 까라면 까는 문화였다. 하기 싫어 억지로 하는 일이 많았다. 모든 과정은 파트장 - 팀장 -임원 - 사장 순서로 보고해야 했다. 일 하나 처리하는 데에 절차가 많고 시간이 오래걸렸다.

이곳은 보고하는 문화도, 시키는 문화도 없다. 개선하고 싶은 점이 있으면 스스로 나선다. 동료들은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나서서 돕는다.

 

업무는 스마트하고 투명하게

이전 직장에서 신입의 덕목은 수첩 지니기였다. 언제 어디서 상사에게 지시를 받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회사에 입사 전 인사팀과 얘기할 때 혹시 수첩을 주냐고 물으니 매우 당황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리둥절 하며 개인 노트를 챙겼고 입사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곳의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기록은 슬랙과 노션을 통한다.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자유롭게 공유받는다. 심지어 리드들의 논의도! 물론 채용이라거나 중요한 일들은 각자 알아서 다른 방법으로 관리되고 있겠지만, 왜 이 일이 이렇게 됐는지 히스토리도 모른 채 일하던 이전 회사와는 너무나 달랐다.

 

반말의 힘은 위대하다

이곳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반말로 소통한다. 안그래도 보수적인 회사에서 구르다 온 유교걸이라 반말을 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특히나 리드 직급에게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네!' 라고 대답하던 것도 '알았어~' 라고 하면 뭔가 예의없어 보이는 것 같아서 적합한 답변이 없을까 몇 분을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옆에 있던 동료가 리드에게 '오키~' 라고 하는 것을 듣고 말았다. 세상에...그래도 어른인데....괜찮은건가....? 혼자 리드의 눈치를 보며 동공이 6.5도 지진만큼 떨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떻냐고? 너무나 잘 적응해버렸다.


반말은 발화의 방법 그 이상의 것을 선사했다. 사람들과 아주 쉽게 친해진다! 낯 가리는 수줍은 성격에다 어른을 특히 어려워하던 내가 단 2주만에 사람들과 무리없이 대화를 하게 되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하루에 한 마디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기존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업무를 할 때도 표현을 고민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한자어를 적절히 섞어 공식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상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완곡하게 돌려 말하느라 고생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안녕이다.

 

도던, do-done!

이젠 출근이 즐겁다. 오늘은 또 어떤 배울 점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회사라는 존재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이야. 나조차도 놀랍고 신기하다.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 너무나 많다. 매 순간이 새롭고 소중하다. 수습이라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2개월 뿐이다. 언제 어디서 또 마주칠지 모르는 멋진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기에 1분 1초가 아쉽다. 더 알차게 do하고 done해서 남은 2개월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